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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12 공자님의 묘지- 공림
  2. 2015.09.12 공자님의 사당- 공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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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공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공자님과 10만명의 후손들의 묘가 있는 "공림(孔林)" 이 있다.

 

엄청난 넓이에 놀라게 되는데, 거대한 숲 안에 수많은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지성림(至聖林)" 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 되었다.

 

 

공림의 입구이다. 

 

 

공림의 이정표.

 

워낙에 넓기 때문에 지도를 손에 들고 이정표를 보고 다니지 않으면 길을 찾기 어렵다.

 

 

제일 먼저 공자님의 묘 부터 찾아서 왔다.

 

가장 크고 잘 되어있으니 찾기 쉽다.

 

 

그래도 대학,논어를 배운 사람으로서 공자님께 예를 올리지 않을수 없다.

 

잠깐 묵념과 함께 길게 읍을 하였다.

 

 

공자님의 묘 옆에 서있는 작은 창고 같은 집인데 공자님의 제자 "자공(子貢)" 공자님 사후에 6년을 이 초옥에서 혼자 머물면서 상을 치르고 수양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2000년 전의 집이 남아있을 리가 없으니 저건 가짜로 만들어 놓은 곳이겠지만, 저 전설은 사실이다.

 

공자님은 3000명이 넘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에 72명만이 그 학문을 제대로 이어받아 세상에 나아가 활약하고 이름을 남겼는데, 자공 역시 그렇다.

 

공자님 말씀에 "덕행(德行)을 따진다면 안휘(顔回)가 으뜸이고, 정사(政事)를 논한다면 계로(季路)가 수위이고, 문학(文學)을 말한다면 자유(子游)를 최고로 친다. 그렇지만 언변을 가지고 평가한다면 자공(子貢)을 따를 자는 아무도 없다." 고 하였다.

 

활달하고 언변이 뛰어났던 그는 많은 사람들과 논쟁하길 즐기고 5개의 나라에서 훌륭히 활약 하기도 하였지만, 이재에 밝아서 그 돈으로 공자님을 뒷받침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공자님 사후에 대부분이 3년상을 마치고 떠날때, 직계가족도 아닌 그만이 남아서 6년간이나 묘를 지켰으니 대단한 사람임과 동시에, 그런 존경을 받은 공자님도 대단하다.

 

 

커다란 숲속에 저렇게 누군지 모를 공자님의 후손 10만명의 묘가 있다.

 

 

공자님의 손자인 "공급(孔伋)" 의 묘인데, 크기와 위치가 좋은 까닭은 그가 공자님의 학문을 이어받아 자신이 "중용(中庸)" 을 저술 하였다.

 

흔히 "논어, 맹자, 대학, 중용" 과 "시경, 서경, 역경" 을 통틀어 "사서삼경" 이라고 한다. 

 

 

 

공림을 가로지르는 하천이 있는데, 이는 공림의 풍수학적 맥을 끊기 위해 진시황이 파놓은 고랑이라고 한다.

 

그 다리를 건너기 위한 다리인 "주수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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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연수 프로그램 중에 가장 중요한 일정이 3박4일간의 산동성 여행이었다.

 

이유는 대학 전공 특성상 꼭 가서 찾아보아야만 하는 공자님의 흔적 때문이다.

 

산동성 곡부(曲阜,취푸) 는 북경에서 550Km정도 떨어져 있는 곳인데, 이곳에 공자님의 묘와 사당, 그의 일족들이 살던 "공부" 라는 마을이 남아있다.

 

너무 먼 곳이라 당일치기는 어렵고, 2002년 당시에는 고속철도가 없어서 일반기차로 하루 종일 가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예 밤에 출발하는 침대칸 기차를 타고 가서 다음날 도착하였다.

(기차칸 여행은 앞에 포스팅 했다)

 

가장 먼저 공자님의 사당이 있는 "공묘" 에 갔는데, 이 곡부라는 도시 자체가 1994년인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어서 공자님 하나로 먹고 사는 도시가 되었다.

 

 

 

공묘 앞에서 단체사진 한장.

 

우리 한의대 사람들과 중국어과 학생들이 함께 있다.

 

 

 

사당까지 가는 길에 수많은 석문이 서 있다.

 

모두 사연이 있을텐데, 무슨 왕이 와서 지은 문...이런 식이다.

 

 

진짜 공묘의 입구인 "성시문(聖時門)" 이다.

 

 

공묘의 중심인 "대성전(大成殿)" 앞에서 다시 단체사진을 찍었다.

 

공자님 께서는 B.C551년 ~ B.C479년 까지 살았던 노나라 사람인데, 한나라부터 공자님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기 시작해서 2000년 넘게 황제들이 인사를 드리던 곳이다.

 

현재 대성전은 1724년 옹정제가 재건한 건물이라고 한다.

 

 

고풍스런 건물이다.

 

 

사당 내부의 모습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2002년 당시에는 핸드폰 카메라는 커녕 흑백 화면이었고, 디지털 카메라도 중국에선 볼수가 없을 정도로 대중화되지 않아서 문화재 실내에서 사진 찍는 것도 제지당하는 일이 없었다.

 

 

 

곳곳에 많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것들은 공묘를 방문한 역대의 황제들이 직접 쓰거나 하사한 것들 이다.

 

 

건물 밖에 있던 비석.

 

 

 

9마리의 용이 조각된 기둥이다.

 

앞서 자금성 포스팅에서 말했지만, 중국에서 용 문양을 쓰는 것은 엄격히 금지가 되었었는데, 더군다나 9마리의 용은 황제를 상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사용하면 대역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공자님은 황제가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향후에 9룡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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