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23.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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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다량의 스포일러성 문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세요)
이야...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만든 영화 한편을 보았다.
원래 나는 공포물이나 슬래셔 무비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신작이 나와도 시큰둥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몇일 전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서영희"씨가 이 작품으로 여우주연상을 타면서 급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시나리오+감독+배우)의 조합이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준 작품인데, 그중에서도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할 수 밖에 없다.
수상 소감에서 "서영희"씨가 밝혔듯이 "남들은 한걸음이 쉬워보이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의 연기인생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짤방 사진들만 보아도 "마파도, 추격자" 등에서 개고생하고 고문당하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역할만 도맡아 해 왔을 뿐더러, 인기도 크게 얻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대한민국 영화대상" 에서 2개의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이니 그녀의 말대로 "이제야 배우로서 인증을 해 준것 같아 기쁘다" 라는 말에 나 또한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영화에서 그녀는 여러가지 여자의 모습을 소름이 돋도록 열연하여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30살이 되도록 무도라는 섬을 벗어나지 못한 본래의 순박한 여성상과,
-여러 남자들에게 몸을 유린당하고 노동을 착취 당하는 불쌍하고 무력한 여성상과,
-같은 여자들에게도 배척받고 딸에게 마저 소외되는(나중엔 좀 다르지만) 외로운 여성상을,
-그리고 종국에는 인간으로서, 엄마로서 분노에 떨며 복수의 칼(낫?)을 드는 강하고 무서운 여성상까지...
아마 2010년에 "이창동" 감독의 "시"에서 "윤정희"씨라는 대배우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1~2년간 한국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은 몽땅 "서영희"의 차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심사위원들의 눈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그리고 남편으로 나오는 "박정학"씨의 연기도 좋았고, 처음 얼굴을 본 것 같은데 예쁜 마스크 뿐만 아니라 시크한 역할을 잘 소화해 낸 "지성원"씨 또한 의외의 발견 이었다.
자...
평소와는 다르게 배우 칭찬부터 쫘~악 풀어 놓았으니 이제 좀더 본질적으로 영화에 파고들어 보자.
영화의 시작이 된 시나리오는 2008년 "한국영화 시나리오마켓" 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완성도 높은 각본이었다.
섬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30년간 갇혀서 산 한 여성과,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냉정하고 이기적인 삶을 산던 한 여성.
이 두 여성상의 대비와 소통이 영화의 가장 큰 핵심이었을텐데, 그것에 덧붙혀서 순박했던 주인공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한의 상태로 몰고 가는 환경들은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혹은 잔인하게 만든다.
특히나 주변의 여성들(할매들)과 남성들이 주인공인 "김복남"을 대하는 방식은 "역시 남자가 최고...여자는 남자 X을 물고 살아야지...그중에서도 복남이 넌 모두의 노예..."라는 식이라서 성적으로, 인격적으로 바닥까지, 지하까지 떨어뜨려 버린다.
그렇게 당위성을 획득하고 관객들을 납득시킨 복남이의 복수는 또한명의 복남이...즉 그녀가 바라고 동경했던 여성상인 "해원(지성원)" 의 무관심과 불친절에 의해 다시한번 이성의 끈을 놓게 되는데, 그것은 결말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장치와 인물들의 배치는 영화의 완성도를 매우 높아지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감독인 "장철수"씨는 젊은 나이와 첫 장편영화 입봉작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고 매우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 내서 첫영화로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앞서 어떤 찌질하신 분이 나의 "악마를 보았다" 관람평을 보고 어이없는 리플을 달아 주셨는데, 단순히 화면속의 잔인성을 부각시킨 "김지운" 식의 연출과 "장철수" 감독의 방법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적이고 아름다운 화면 속에서 강렬히 대비되는 선정성, 폭력성, 잔인성을 내보이는 "장철수" 감독의 연출 방식은 그의 스승인 "김기덕" 감독의 방법론에 매우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전공이 아니다가 갑자기 프랑스에서 본 영화 때문에 독고다이로 감독이 된 "김기덕", 그리고 일본 유학시절 우연히 본 "김기덕" 감독의 영화 때문에 무작정 한국으로 돌아와 "김기덕" 감독의 연출부 막내로 들어간 "장철수"...
그렇게 닮은 꼴인 두 감독의 연출 방식은 묘한 설득력을 가지고 인물을 그려내기 때문에 그 폭력성이나 잔인함이 매우 적나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술적으로 승화되어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여기서 "김지운" 감독이 상업영화 감독임이 분명해 지고, 다수의 해외 영화제에서 인정받는 "김기덕" 감독과의 차이점 또한 분명해 지는 것이다.
그리고 "장철수" 감독만의 섬세한 연출 또한 인상 깊었는데, 여성을 그리는 영화에서 몇가지 장면과 소품 만으로 인물의 캐릭터를 순식간에 기억시키고, 중요한 장면에서 구도와 배치 만으로도 복선과 암시를 나타내는 의도는 초짜 입봉 감독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노련했다.
예를 들어 차가운 도시 여성 "해원"의 은행장면이나 집에서의 기네스 흑맥주...
섬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섹스신과 환각작용을 유도하는 식물...
아이가 죽은 후 남편에게 얻어맞고 마당에 널부러 졌을때 우연히 머리 맡에 놓여있는 아이의 웃는 사진...
발기불능인 남편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식칼 애무 장면...
유아기부터 등장하는 중요 소품인 리코더와 마지막 감옥에서의 두 여자...
인상깊은 장면이 너무나도 많았다.
개인적으로 전라남도 완도군의 한 섬에서 군생활을 한 입장에서, 여수의 섬을 배경으로 한 이영화는 많은 것을 회상하게 해서 더욱 슬프고 안타까웠다.
슬래셔 고어무비를 보고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역시 잘 만들어진 영화 탓이 아닐까 싶다.
아직 보지 못하신 분은 2010년 최고의 영화를 놓치지 말고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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