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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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환타지 소설을 손에 잡게 된 계기는 이러하다.
그간 수기,수필,기행문,정치경제사회서적 등을 읽다 보니 점점 머리가 굳어가는 것 같고, 책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는 현실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이유의 직접적 원인은 5개월동안 100페이지 밖에 읽지 못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700페이지짜리 천체과학서적의 절대적인 지식의 방대함에 질렸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출퇴근 시간에 가볍게 읽을 요량으로 오랜만에 환타지나 무협 소설을 읽어 보고자 했으나, 그간 한국 출판시장의 규모는 죽었지만 출간되는 서적의 양은 늘어가고 있었으니...
특히 매니아 층이 탄탄한 환타지,무협 문학 장르에서는 한국형 장르의 특성이 외국의 모방이듯이 매니아들이 서서히 스스로를 작가의 대열에 합류코저 노력함에 따라 대량의 출판 러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 속에서 원조 장르 매니아가 아닌 지뇽군이 양질의 책을 고르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따라서 역시 매니아들의 적극 추천에 힘입어 "하얀늑대들"을 손에 잡게 되었다.
이전에 매니아들의 추천에 의해 읽은 "하얀 로냐프의 강, 드래곤 라쟈,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폴라립스 랩소디.."등의 환타지 서적은 모두 충분히 기대를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에 또 추천에 대한 신뢰를 품었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범작은 아니었다.
다만 가볍게 읽으려고 한 책이 全12권, 양장본 8권으로 이루어진 장편이어서 힘들었는데, 이유는 출퇴근 시간 전철에서 밖에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불쌍한 내 신세 때문이라~ 오호! 통재라!!!
어쨌든 1달 조금 모자란 시간 동안 12권의 책을 몰아서 읽다보니 "코스모스"의 피곤함을 넘어서는 피곤이 나의 일상을 잠식해 오고 있었다.
서론이 너무 길었으니 대충 책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입문서는 아니지만 정형성은 확실하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중세유럽" 비스무레한 시공간적 배경과 함께 "왕,영주,귀족,기사단"의 체제를 갖춘 바탕위에 "기사,어쌔신,마법사,엘프,드래곤"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환타지 장르 문학의 정형성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꽉 짜여진 배경과 방대한 스토리 상에서 환타지 문학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 하더라도 전혀 어려움 없이 책장을 광속으로 넘기게 하는 이유가 있었으니...
이 소설에는 절대 "전문지식"이 등장하지 않는다.
요즘의 소설에서는 경쟁적으로 차별성을 띠기 위해 같잖은 지식과 설정 자랑에 열을 올리고 있어서 독자들이 도입부를 읽으면서 세계관에 대한 개념을 잡기도 어렵고, 갖가지 전문용어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불친절한 소설 때문에 민망함을 느끼게 되는 일이 허다하다.
예를 들면 칼만 봐도 "바스타드, 롱소드, 대거, 레이피어, 클레이모어..." 등이 등장하고, 마법의 경우에도 갖가지 스펠이 난무하고 "무슨무슨 블래스트~~~, 무슨무슨 볼~~~" 참 거창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런 전문지식을 자랑하는 일은 없으니 안심하고 책을 들자.
2. 작가의 필력의 향상과 정체.
아마도 "다크문"인가 하는 환타지 소설로 큰 인기를 끌었던 "윤현승"씨의 2003년 작인 이 소설은 기나긴 여정 동안에 작가도 함께 성장해 가는 것이 보여진다.
뭐, 내가 그런 것까지 평가할 자격은 없지만 아직 문체가 완성되지 않은 작가가 장편 문학을 저술하는 경우 흔하게 보이는 일이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마치 만화책에서 1권의 그림과 30권에서의 그림이 차이가 나듯이...
3인칭의 시점을 고수하고 있던 이 소설은 1부에서는 주인공 중심의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는 형식을 보이는데, 이는 작가도 쓰기 편하고 독자도 따라가기 편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2부로 넘어가면서 등장인물도 많아지고 사건 전개가 넓은 세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 지기 때문에 위와 같은 방식을 고수했다가는 필력이 사건전개를 따라가지 못해 정체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기서부터 작가는 사건 분할을 통한 각각의 인물 중심의 서술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그러나 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사건이 세계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면서 "인물" 중심의 서술 만으로는 평면적인 서술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여기서 작가는 "시간"의 개념에 따른 서술을 시작한다.
예를 들면 "그 사건이 일어나기 7일전" 이라는 소제목이 각 편마다 붙는 것이다.
7일전, 6일전...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작가의 발전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긴 하나, 하나의 작품에서 이렇게 서술의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분명 작품의 가치를 깎아내릴 수 밖에 없는 중대한 단점이 될 수 밖에 없음에 주의해야 한다.
3. 먼치킨을 배제한 보편적이면서 독특한 주인공.
환타지 소설이든 무협 소설이든 "주인공의 성장"이 가장 큰 내용 전개의 방향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연,기보가 난무하게 되고 주인공은 점점 힘을 키워 짱이 되어간다.
독자들이 이러한 내용을 기대하고, 또한 그 주인공에 감정이입이 되어 흥분을 이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작품은 천지빼까리로 깔리고 넘친다.
여기서 작가의 유니크함이 돋보이는 설정이 등장하는데, "기사단의 캡틴인데 칼싸움 실력은 젬병" 이라는 특징을 가진 주인공의 등장이다.
대게 뛰어난 칼솜씨와 리더쉽을 지닌 자가 기사단의 캡틴이 되는 것이 정상이고, 환타지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그런 자질을 갖추고 그런 자리에 오르는 것이겠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농부의 아들, 칼솜씨 제로, 입만 살아서 사기를 잘치는 청년" 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주인공이 "캡틴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소설 시작부터 이미 주인공은 "캡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에게 실력 향상은 필요치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여타의 범작에 머무르는 환타지 소설과는 행보를 달리할 수 있게 된다.
캡틴에서부터 시작한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은 "진정한 캡틴이 되는 길" 뿐이기 때문이다.
4. 그래도 가슴뛰게 하는 남자들의 환타지.
남자라면 누구나 "삼국지"를 읽었을테고, 장판교에서 일기당천의 기세로 적군을 막아서는 "조운" 의 모습에 심장이 뛰었을 것이고, "관우"의 고뇌에서 사나이의 진심을 배웠을 것이며, "왜 하늘은 나를 낳고 공명을 나았나이까!!!"라고 울부짖은 "주유"를 통해 비통한 투쟁심을 새겼을 것이다.
"하얀늑대들"이 많은 점에서 기존의 환타지 문학과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이러한 맥락의 중요점은 절대 놓치지 않고 있다.
주인공이 싸움을 못한다고 해서 소설에 박력이 떨어지겠는가?
그의 친구들은 세계 최고의 기사단이니, 1대1로는 세계 제일인 "로일"이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벨 때 희열을 느꼈을 것이고, "불의 용병 게랄드"가 사랑하는 여자 "아즈윈"을 구하기 위해 수천마리의 모즈(괴물)들을 뚫고 장렬히 전사할 때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다.
물론 약해빠진 주인공인 "카셀" 또한 놀고 있지만은 않다.
유일한 무기인 "세치 혀"를 앞세워 한 나라의 국왕과 귀족 제현, 그리고 기세 당당한 기사나 적을 대할 때...
그의 긴장이 내 손안의 땀으로 전해지고,
그의 말이 나의 희열이 되고,
그의 성취가 나를 만족하게 해준다.
세계 최강의 영웅만이 주인공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요즘 글을 쓰는데 매너리즘에 빠져서 절대 길게 쓸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길게 써 버렸다.
게다가 지금 이 시간은 크리스마스 새벽 4시 54분이다.
나...미친거 아니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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