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공자님의 후손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인 "공부(孔府)" 가 있다.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곳으로, "성부(聖府)" 라고도 한다.
공자님의 자손은 예로부터 학문으로 유명했고 황제가 인정한 어느정도 귀족적인 지위를 지녔었다.
송나라에는 "연성공" 이라는 직책으로 공부에서 관의 업무를 대대로 보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152채의 건물에 480개의 방이 있는 대단한 규모로서, 다 돌아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대충 중요한 곳만 보는 것이 좋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곳 답게 그간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같이 했고, 수많은 전란을 거쳐야 했다.
그때 피해서 숨었다는 피난탑이다.
공자님때 부터 사용했다는 우물.
시간 없는 사람은 "공부" 에 가서 이것만 보고 오자!!!
사실 별로 보잘것 없는 벽일 뿐이지만, "노벽(魯壁)" 역사적 가치는 천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B.C213년 천하를 통일한 진시왕은 실용학문을 제외한 모든 유학을 제거하고자 했는데, 세상의 책들을 모두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산채로 땅에 묻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 가 바로 그것이다.
유학의 대가였던 공자님의 학문과 집안 모두 겁화를 피할수가 없었는데, 차후에 B.C154년 한무제때 건물들을 재건하는 공사중에 허물어진 벽에서 <논어(論語)>, <춘추(春秋)>, <예기(禮記)> 등 10여개의 고문서가 발견된다.
이것은 공자님의 9대손인 "공부"가 분서갱유 당시에 몰래 숨겨 놓았던 것이라고 한다.
당시 세상에는 한나라 이후의 문자로 된 책들밖에 없었는데, 이 책들에서 고문(古文)이 발견되어 학문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뜬금없이 등장한 "서태후" 가 하사한 글씨 족자.
꽤 큰 크기인데, 1000만녕이 소모된 서태후의 환갑연에서 공자의 76대손인 "공영의" 부부가 환갑연회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쩄든 수많은 황제들이 방문하던 곳이라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ㅋㅋ 깃털로 만들어진 고풍스런 먼지털이개가 보여서 사진을 찍어 보았다.
공자님은 어떤 사람이었나...
공자님의 초상화.
공자님의 제자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 한명, "자공(子貢)" 이 직접 심은 나무가 2000년의 세월을 거쳐 아직 남아있다고 한다.
믿을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공묘, 공부의 화장실...
옆사람, 앞사람과 얼굴 보고 대화도 나누고 변을 잘 보는지 까지 확인이 가능한 개방형 구조이다.
10년전 까지만 해도 중국 곳곳의 화장실이 대부분 저런 모습이었다.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대대적으로 현대화 되었다고 하니까 요즘은 바뀌었기를...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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